#1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클래식과 재즈에 조예가 깊은지 알 수 있다. 노래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는 텍스트에 생명을 불어넣어 현장감을 제공할 뿐 아니라, 독자도 따라 듣고 싶게 만든다. (예를 들어, <1Q84>에서 아오마메가 호텔바에 들어갔을 때 등장하는 ‘It’s only a paper moon’은 따라 듣다가 아끼는 곡이 되어버렸는데, 특히 가사가 너무 좋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을 뭉클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음) 그런데 그가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선생과 음악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눈 책이 있다니 안 읽어볼 수가 없었다.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라는 직관적인 제목이다.
#2
책을 선택할 때 표지가 차지하는 부분은 정말 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이고, 그 다음은 제목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표현했는가? 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표지는 보자마자 감탄했다. 제목을 이루는 단어의 초성을 상단에, 중성과 종성을 하단에 배치해서 나열했는데 이응이 많아서인지 마치 오선지에 놓인 음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누구지? 하고 찾아봤는데, 얼마전 ‘남의집 프로젝트’ 강연에서 손님으로 오셨던 정지현 디자이너라서 깜짝 놀랐다. 반가운 마음에, 여행 중이라 바쁘실텐데 페이스북 메시지로 엄지척을 날렸음.
#3
베토벤을 비롯하여 브람스, 말러 등의 작곡가와 작품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룬다. 실제로 유투브로 음악을 들어보며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고, 그 중에서도 관심을 가졌으나 잘 몰랐던 글렌 굴드에 대해 한 단계 깊이 알게되어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좋아했는데,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은 1955년 버전이었다. 그런데 유투브에서 찾아보니 81년 버전을 발견하게 됐고, 덕분에 몰입하는 천재의 움직임을 넋을 놓고 볼 수 있었다. 참고로 그는 허밍을 하며 연주하는 버릇이 있는데 당시 녹음기사가 엄청난 고생을 했다한다.
#4
앞으로 하루키 자신이 문외한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 믿지 않기로 했다. 책 서문에 자신이 계속 클래식 문외한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막상 본문을 읽어보면 평생을 클래식 업계에 몸 담았던 오자와 세이지보다 아는 부분이 많다. 오자와 세이지도 인정했는데, 그가 쓴 후기를 읽어보면 된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는 많이 있지만, 하루키 씨는 정상의 범주를 한참 벗어났다. 클래식도, 재즈도 그렇다. 그는 그저 음악을 좋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많이 알고 있다. 세세한 것도, 오래전 것도, 음악가에 관한 것도, 깜짝 놀랄 만큼. 음악회에도 가고, 재즈 라이브에도 가는 모양이다. 집에서 레코드도 듣는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알아서 놀라게 된다. (p.359)
#5
‘사이토 기넨 오케스트라’ 라고 있다. 평상시에는 단원들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며 살다가, 공연이 있을 때마다 휴가를 쓰는 등의 방법으로 전세계에서 모여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다. 연주 퀄리티는 이루 말할 것도 없을테고, 공연 때마다 단원들이 각자 자신의 짐을 동여매고 음악당으로 향하는 모습이 상상돼 괜히 미소가 지어짐. 정말 멋진 삶이다.
#6
하루키 책에 술이 단 한 번이라도 등장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예의주시하며 찾아본 결과 이탈리아 식전주인 ‘푼테메스(Punt e Mes)’를 발견하게 됐다. 이탈리아에서 루빈스타인이 세이지에게 알려줬다는데, 역시나 이야기를 들으니 당장 마시고 싶어졌다.
#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전 글 쓰는 법 같은 걸 누구한테 배운 적이 없고, 딱히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디서 글 쓰는 법을 배웠느냐 하면 음악에서 배웠거든요. 거기서 뭐가 제일 중요하냐 하면 리듬이죠. 글에 리듬이 없으면 그런 거 아무도 안 읽습니다. (중략) 단어의 조합, 문장의 조합, 문단의 조합, 딱딱함과 부드러움, 무거움과 가벼움의 조합, 균형과 불균형의 조합, 문장부호의 조합, 톤의 조합에 의해 리듬이 생깁니다.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