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변하기 마련이다. 음식, 영화, 책 등 우리가 기호를 가지고 선택을 하는 것들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애정도가 변하곤 한다. (물론 고흐와 쇼팽 그리고 돈까스처럼 만고불변의 진리로 꾸준히 좋아하는 것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르누아르였다. 처음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는 순간, 어쩜 이리 따뜻하고 행복하게 묘사를 했을까? 하는 생각에 그의 그림들을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오르셰 미술관에 갔을 때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산 뒤 고이 모셔와 액자화하여 집에 걸어두기도 했다.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 그림은 6년째 우리 집을 따뜻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나이를 먹게 됨에 따라, 그저 아름답고 따뜻함이 표면에 드러나는 그의 그림보다 고독이 묻어나고 그림 이면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에드워드 호퍼를 더 좋아하게 됐다.

책바에는 정인성의 확장판이라는 전 회사 동기의 말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다. 예술을 다룬 책들도 몇 권 있는데, 책바의 작은 한 켠을 차지하는 화가는 김환기와 르네 마그리트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이다. (생각해보니, 고흐가 없구나)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첫 번째 책은 박상미 작가가 번역한 <시인이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이다. 2007년도에 출간되었는데, 호퍼에 관한 최초의 번역책이었다니 당시 미술계의 동향을 고려해 보았을 때 엄청난 선구안 임에 틀림없다.

지난 5월, 뉴욕에 다녀왔다. 메트로폴리탄, MOMA, 휘트니, 구겐하임, 노이에 갤러리, 프릭 컬렉션을 모두 다녀왔으니 과히 미술관 여행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뉴욕에는 스트랜드 북스토어라는 유서 깊은 서점이 있다. 신규 서적과 중고 서적을 모두 판매하는 독특한 서점이다. 이 곳을 구경하다가 HOPPER라는 볼드체로 진지하게 제목이 쓰여진 책을 발견했다. 저자는 마크 스트랜드(Mark strand)로, 퓰리처 수상자란다. 더불어 중고 서적인데 잘 보존되어 있어서 27.5달러의 책을 16.5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래서 1초의 고민도 없이 구입을 하고 책바에 가져왔다.

놀랍게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책인 <시인이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은 뉴욕에서 사온 의 번역본이었던 것이었다. 기존의 책을 읽지 않았던 부끄러움과 동시에 묘한 쾌감이 밀려나왔다. 왠지 운명 같은 만남이랄까. 지금도 두 책은 책바에 나란히 잘 진열되어 있다. 이 책은 재밌지는 않지만 호퍼의 기하학적인 묘사를 시인의 시선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이 있다. 어떤 손님은 책의 리뷰를 깨알 같이 책갈피에 써서 남기고 가셨다. 이렇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는 궁금의 미학이 있다. 작품 그 자체로 크게 다가와 의미와 감상을 주는 작품이 있는 반면, 자꾸만 그림 너머의 것을 궁금하게 하는 그래서 개인적인 의미를 덧붙이게 하는 작품이 있다. 호퍼의 그림들은 후자이다. 그는 그림 속 스토리의 한 부분은 표현하지 않은 채로 숨겨둔다. 그럼 나머지는 온전히 감상하는 이들에게 맡겨진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하다. (16.05.14)

일설에 의하면, 호퍼 전시회가 머지 않아 열린다고 한다. ‘나이트호크(Nighthawk)’와 ‘푸른 저녁(Soir Bleu)’ 그리고 ‘볕을 쬐는 사람들(People in the sun)’이 온다면 소원이 없겠다. 그 날, 나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p.48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퍼의 그림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어차피 우리는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떠나가는 존재가 아닌가.

p.53

실제로 호퍼가 표현하는 빛의 특징 중 하나는, 예를 들면 인상주의 회화의 빛처럼 대기를 채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p.67

호퍼의 그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림 밖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해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길과 철길은 추측만 가능한 소실점으로 이어진다. 호퍼는 이런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종종 그림 안에 들여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