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만큼 더 알고 싶어하는 보편타당한 마음으로 읽은 책. 결코 만만한 책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이해한 문장들은 모두 마음 속에 깊이 담아두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덕분에 홈페이지 포스팅 뚱뚱해질듯) 이제 ‘아주 조금은’ 떳떳하게 그의 세계관과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캘린더를 보니, 이제 50일도 안 남았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나는 여러 화가의 화면 속에 보이는, 그저 빈 공간을 여백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언가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북을 치면 소리가 주위 공간에 울려 퍼지게 된다. 큰 북을 포함한 이 바이브레이션의 공간을 여백이라 하고 싶다. (중략) 그러니까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 만든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 내부와 외부가 자극적인 관계로 서로 작용하고 울려 퍼질 때, 그 공간에서 시나 비평이나 초월성을 느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여백이란, 자기와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열리는 앙양된 공간을 말한다. (p.16-17)

나의 예술관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무한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이며 그 탐구이다. 무한이란 자기에서 출발하여 자기 이외의 것과 관련을 맺을 때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정립하고 표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와의 관련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그 관계가 성립하는 장에서 세계를 느끼고 깨쳤으면 하는 바이다. (p.19)

내 작품은 단순하며 동시에 복잡하다. 작품의 소재 선택이라든가 구성, 제작 행위를 최소한의 것으로 그치게 한다는 의미에서는 엄격하게 자기를 한정시키고 있으며, 무규정한 소재를 그대로 쓰거나 주위 공간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는 복합적이며 까다롭다. 곧 자신을 최소한으로 한정시킴으로써 최대한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p.22)

적어도 화가나 조각가에게 있어서, 본다는 일은 좀더 다른 차원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통상, 보는 동안에 일어나는 자기분열은 제작을 계기로 희안하게 두 가지로 분리된다. 대상을 보는 눈과 회화를 보는 눈으로. 화가는 단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면서, 곧 그려지는 그림을 보는 한편, 또한 대상도 보는 것이다. (p.149)

여백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공백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이 서로 호응하여 선명하게 울려퍼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략) 작품의 제요소가 터트림으로서 관계지어짐에 인해 거기에 바이브레이션이 일어나고 시공간이 열려 장소가 된다. 곧 장소란 터트려짐의 공간이며 사물이 그러한 현상학적인 펼침에 의해 무한성을 띠는 영역인 것이다. 회화적 세계로서는 이를 여백이라고 부른다. 좀더 넓게 조각이나 다른 분야까지 포함하면 형이상적인 초월성을 시사한다는 무의 장소라고 부르고 싶다. (p.262)

내 생각에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때는 먼저 대상을 보는 법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상이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써 거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보이게 되는 것들입니다. (중략)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란 거기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거기에 관련되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하는 것으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가 앓고 있을 때, 그 개한테서 병을 보게 되거나, 일하고 있는 아버지의 다 떨어진 신발을 보고 노동의 힘듦을 알아차리거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면 주위 공기의 떨림을 느끼거나, 오래된 석불의 파편을 보고는 아득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거나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대상과 함께 거기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상이나 그 주위를 잘 보아가면 이윽고 어느 것도 다 시공간적으로 서로 연관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대상성을 넘어 더욱 깊고 넓은 세계를 문제삼게 될 것입니다. 우선은 마음에 걸리는 대상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대상이 어떤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관찰하기도 하고 생각도 해보고 형형색색으로 흥미와 상상력을 불태워주세요. (p.342-343)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림의 의미나 그리는 방식을 알아내기보다는 우선 마음을 열고 한동안 그림의 상황을 계속 보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될 수 있는대로 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겨 마음에 걸리는 실물 그림에 직접 접하고 친해지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면서 또한 배웁시다. (중략) 정말이지 미술관에서는 별의별 그림이 마치 연인처럼 언제나 자네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p.344-345)

하나의 점을 찍으면, 갑자기 언저리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지면의 상공 낮게 생기로 팽팽한 공기가 떠돈다. 이 싱싱한 일루전의 체험은 드디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p.353)

다가가 보면 물질의 상태이고, 멀리 떨어져 보면 관념의 시스템이다. 작품의 비밀은 거리의 역학에 있다. (p.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