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설가의 소설만 읽어오다가 어느 순간 에세이를 읽으면 그 소설가와 한결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소설에서는 느끼기 힘든 작가의 가치관과 인간미가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그랬고, 김영하와 김연수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때로는 (소설가에게 예의가 아니지만)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지기도 한다.
<소설 마시는 시간>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나름 가깝다(!)고 생각한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인 <5년 만에 신혼여행>을 읽었다. 제목 그대로 결혼 후 5년 만에 보라카이로 떠난 여행 에세이다. 흥미롭게도 보라카이 여행기 자체보다, 왜 5년 만에 신혼 여행을 떠났는지에 대해 서술한 부분들이 공감이 많이 갔고 더 재밌게 읽혔다.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사 및 결혼을 했고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부인인 HJ와 협의하여 정관 수술을 감행했다. 그가 쓴 소설인 <한국이 싫어서> 주인공들의 실제 모델이 자신들이라니 마땅히 그 선택을 할 만하다. 글을 읽어보니, 나와 결이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더 정감이 간다. 앞으로 열심히 작가님의 글을 읽고 응원도 해야겠다.
#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p.36
나와 부모님은 서로 데면데면하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그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의 궁합은 매우 안 좋다. 부모님과 나는 어떤 점은 놀랄 정도로 닮았고, 어떤 점은 매우 다르다. 고집스러움, 오만함, 독선적인 태도는 비슷하다. 반면 성공에 대한 기준이라든가, 야심이라든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서로 생각이 극과 극에 있다. 성격은 비슷하고 가치관이 다르다. 최악의 조합이다.
p.37
우리 부모님이 특별히 나쁜 분들은 아니다. 사실 이건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이 공통으로 갖는 문제다. 자식들의 인생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 자신이 타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자식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신적인 폭력을 서슴지 않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부모들을 이해한다.
그런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사랑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위험에 빠지는 광경을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안락한 감옥을 만들어 자식을 그 안에 가두고 싶어 한다. 과보호.
그리고 그 감옥 안에 갇혀 있는 한 자식은 영원히 성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된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히 애완동물이다.
p.40
자식이 위험에 빠지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모험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모험을 권하는 부모도 없다 (선량한 부모들이 자식에게 모험을 허락하는 순간은, 자식에게 닥칠 최악의 위험도 자신들이 수습할 수 있을 때이다. 그래서 부자 부모 아래서 자란 젊은이가 더 많은 모험을 누리게 되고, 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
p.201
“내가 ‘나의 행복 리스트’를 정리하는 거 알지? 행복을 느낄 때마다 스마트폰 캘린더에 그 날짜랑 이유를 적어놓는 거. 그런데 보라카이에 온 다음에 그 리스트에 올라간 순간이 없어. 그 정도로 행복을 느낀 적이 없어.”
“어젯밤에 식당에서 음악 들으면서 좋아하지 않았어?”
“그게…… 좋긴 좋았는데, 뭔가 약간 부족했어.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내 행복 리스트에 뭐가 적혀 있는지 알지?”
“다 먹는 거잖아.”
내가 대답했다.
“토요엘 아침에 소파에 편히 앉아서 컴퓨터로 <라디오 스타> 보면서 자기가 사 온 샌드위치 먹으면서 모닝커피를 마셨다, 이런 게 적혀 있어. 그게 그렇게 행복했던 거야. 그런데 보라카이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어.”
“여기 음식이 별로라서 행복을 못 느꼈나?
사실 보라카이에서 파는 요리들은 그냥 괜찮은 정도였다. 엄청난 맛집은 없었다. 그리고 HJ는 음식에 관한 한 기준이 엄청나게 까다로우니까.
“심지어 내 행복 리스트에 이런 것도 있어. 올해 6월에 지방선거가 있었어. 그때 투표하러 가면서 신도림중학교 옆을 걸어가는데 여름이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나무에 파릇파릇하게 잎이 났더라고. 그 길을 걸어가는데 그때 너무 행복했거든. 왜 그날은 내 행복 리스트에 오르는데, 화이트 비치에서 석양을 본 경험은 목록에 오르지 못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