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원제: Essay in Love>를 읽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존에 내가 읽었던 소설들은 대부분 서사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정신없이 몰입하며 읽었던 기억만이 남는다. 하지만, 그의 책은 서두부터 주인공이 생각하는 알고리즘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더이상 주인공의 행동과 감정을 허투루 추측할 필요가 없었고, 책을 읽는 시간이 다소 느려졌지만 그만큼 농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
작년에 나온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원제: Course of Love> 역시 서술 방식은 이전의 저작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그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썼을 때의 나이가 이십대 중반이었다면, 이 책은 무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썼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는 그 사이 결혼을 했을 터이고 결혼에 대한 환상을 품기도, 혹은 깨지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낭만이 있다. 배낭을 메고 떠나는 세계여행에 대한, 자서전에 대한, 원하는 대로 꾸미는 나만의 집에 대한, 이성 친구에 대한 등등. 특히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경우, 그 낭만의 정도는 더욱 크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은 최대의 낭만이다. (동시에 최대의 현실이리라)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인생 최대의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혼을 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한편, 나이를 먹을수록 결혼에 대한 낭만보다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결혼을 말리기도 하고, 조기 이혼과 황혼 이혼도 많아졌다. 마냥 남들 따라서 나이에 맞춰 하기에는 너무나도 신중해야하는 선택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 라비와 커스틴은 여느 연인처럼 서로에게 빠지고 점점 스며들다가 결혼에 이른다. 그리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로의 가치관에서 조금씩 틈을 발견하게 되고 각종 갈등이 발생한다. 이럴 때 가장 현명한 행동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한들 결국은 다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꾸준히 대화를 나눠야 한다. 많은 면에서 노력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들의 관계에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던 최적의 사람과 함께. 그리고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p.27-28
라비는 느린 걸음으로 토요일의 인파를 헤치며 쿼터마일의 집으로 향한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행운을 나눠주고 싶을 지경이다. 여하튼 그는 사랑에 관한 낭만적인 관념을 지탱하는 핵심 과제 세 가지를 족히 통과했다. 사람을 제대로 만났고,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녀가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 한 문단으로 정리한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원제는 인데, 한글 제목을 정하느라 출판사에서 꽤나 고생하셨을 듯. 결국 핵심은 낭만 vs. 현실이다.
p.30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그녀의 침착함, 다 잘될 거라는 믿음, 적은 피해 의식, 운명론의 부재다. 일시적이란 단어를 말할 때 세 번을 확인해야 할 정도로 알아듣기 힘든 말씨를 쓰는 새로 사귄 별난 스코틀랜드 친구에겐 이런 장점들이 있다. 라비의 사랑은 약점을 보완해주는 강점들과 자신이 열망하는 자질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논리적 반응이다. 그의 사랑은 불완전하다는 느낌에서, 완전해지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다.
p.116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 나의 그런 모습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서로가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면, (아마도) 하나 둘씩 나올테고 그저 우리는 그런 모습을 서로 이해해주고 배려하면 된다.
p.251
불안정한 사람은 파트너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투심을 분출하고,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깝지’ 않은 것을 슬퍼하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쉽다. 한편 회피적인 사람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때때로 성적 친밀함에 대한 요구를 힘겹게 느낄 수 있다.
p.259
라비는 불안해하면서 공격하고, 커스틴은 회피하면서 퇴각한다. 그들은 서로를 몹시 필요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두려워한다. 둘 다 상처를 진심으로 인정하거나 느끼거나 또는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상처를 붙들고 있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불쾌하게 한 사람을 계속 믿는 데 필요한 비축된 자신감이 없다. 사실은 ‘화가 났거나’ ‘냉담한’게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가슴 아프고 애정을 받아 마땅한 ‘상처받은’ 상태임을 분명히 하려면 상대방을 충분히 믿어야만 할 텐데도 말이다. 그들은 낭만적인 면에서 가장 필요한 선물, 즉 그들 자신의 취약점에 대한 안내서를 주고받지 못한다.
p.278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p.283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