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파리 살롱은 충격에 휩싸였다. 침대 위에 누운 채 도발적인 시선으로 관람객을 바라보는 어느 여성이 등장한 그림 때문이었다. 바로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Olympia)>이다. 올랭피아 이전의 누드화는 비너스처럼 성경과 신화 속에 등장한 인물들만이 대상이었다. 그렇게 여성의 누드는 우의적이고 이상적으로 표현될 뿐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이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는 한 여성을 그렸는데, 하필이면 그녀는 창녀였다. 하녀가 전달하는 꽃은 고객이 보낸 선물을 의미하고, 검은 고양이는 남성을 상징하여 그녀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냈다. (하단의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를 참고하면 두 그림이 명확히 대조된다)
그러자, 온갖 비평가들이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날 것 그대로 드러난 것 같은 부끄러움이 가득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비판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묵묵히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는 미술 평론가(이자 소설가 등의 르네상스형 인간)인 존 버거가 쓴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등장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기도 하다.
위대한 예술가란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열악한 물질적 환경에 맞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몰이해에 맞서,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맞서 투쟁을 하는 사람. 그는 천사와 씨름을 벌이는 야곱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그 예는 미켈란젤로에서 고흐까지 이어진다.) (중략) 대략 열여섯 살 때부터 전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에 적합한 작업 방식을 공부했던 도제나 학생이 예외적인 화가가 되려면,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시각이 중요함을 깨닫고 전통적인 관습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키워 나가야만 한다. 혼자 힘으로 자기가 이제까지 배워 온 예술의 규범에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로서의 시각을 거부하는 화가로 스스로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동안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p.129 – 130)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원제는 ‘Ways of Seeing’이다. 여기서 왜 The way of seeing이 아닌 복수 형태로 썼느냐?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존 버거는 영국의 제도화된 강단 미술사학의 암묵적인 전제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틀로 규정 지어진 것이 아닌,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책은 일곱 챕터로 나뉘어졌고, 이 중에서 네 꼭지는 글, 세 꼭지는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에세이다. <올랭피아>와 같은 누드화를 통해 고찰한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 유화와 광고를 비교한 이야기 등 미술 전반에 걸친 그의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쓴 다른 글들도 궁금해졌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원근법을 사용하는 모든 소묘와 회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가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카메라, 특히 영화 카메라는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카메라의 발명은 사람들의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가시적인 것은 이제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점은 즉시 회화에 반영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돼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도망쳐 사라지는 것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더 이상 단일한 눈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묘사하는 사물 또는 인물 주위의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본 광경들을 한데 모은 전체를 가리켰다. (p.23)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성애의 이미지 대부분은 문자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다 같이 똑바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적 행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자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p.67)
미술사는 유럽의 회화 전통 속에서 탁월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구분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천재’라는 개념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그 결과 혼란은 미술관의 전시 벽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흔히 수많은 삼류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 이에 대한 해명은 고사하고 – 무엇이 그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p.103)
위대한 예술가란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열악한 물질적 환경에 맞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몰이해에 맞서,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맞서 투쟁을 하는 사람. 그는 천사와 씨름을 벌이는 야곱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그 예는 미켈란젤로에서 고흐까지 이어진다.) (중략) 대략 열여섯 살 때부터 전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에 적합한 작업 방식을 공부했던 도제나 학생이 예외적인 화가가 되려면,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시각이 중요함을 깨닫고 전통적인 관습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키워 나가야만 한다. 혼자 힘으로 자기가 이제까지 배워 온 예술의 규범에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로서의 시각을 거부하는 화가로 스스로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동안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p.129 – 130)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p.154)
유화는 소유주가 자신의 소유물들과 생활방식을 통해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치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더 확고하게 갖도록 한다. 유화는 기존의 자기 자신이 좀 더 잘난 존재라고 느끼도록 해 준다. 그것은 사실들, 즉 그의 생활의 실제에서 시작되었다. 그림은 그가 실제로 살고 있던 저택의 내부를 꾸며주는 것이었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적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그가 광고하는 물품을 구입한다면 그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