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보통과 조금 다른 삶 (#4. 사람이 느끼는 가장 행복한 속도는)

작성자
J
작성일
2018-09-28 13:40
조회
929
군대에서 레펠 훈련을 하다가 8m 높이에서 추락한 적이 있다.



사람이 줄에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조금씩 내려가는 것이 레펠 훈련인데, 직전까지 아무 문제없이 진행됐다가 하필이면 내 차례에서 나를 지탱하던 동아줄이 ‘툭' 하고 끊겨버렸다. 분명 책이나 영화에서는 사람이 죽는 순간에 그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 하는 찰나에 이미 땅에 널브러져 버렸다. 책과 영화가 거짓말을 했는지 혹은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지 삶이든 뭐든 주마등처럼 지나갈 틈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앉은 자세 그대로 떨어져 엉덩이 밑에 깔렸던 왼손 인대만 조금 늘어난 것에 그쳤다. 전날 비가 내려 바닥에 있는 흙이 쿠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운이 참 좋았다는 정도로만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내가 배치된 부서는 소방서 내의 구조대였다. 사고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출동해서 가장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는 팀이었다. 그러다 보니 강도 높은 훈련이 일상이었다. 하물며 일개 군인 신분임에도 벽을 밟으며 내려가는 전진 레펠 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서 작업을 하던 중 비보를 접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하던 구조대원 한 분이 훈련 도중 6m 높이 바위에서 추락해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허리 부상으로 일 년 동안 입원하게 됐고, 복귀한 이후에도 여전히 절뚝거렸으며 보직은 내근 부서로 바뀌었다. 이 사건은 그때 당시 큰 충격을 줬다. 일 년 전의 내 모습과 자연스레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그랬다면...?’ 이라는 가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 새벽마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몸을 마음껏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달리지 않는다. 대신 자전거를 탄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속도는 다르다. 어떤 사람은 시속 200km가 넘는 자동차를 통해, 어떤 사람은 자신의 두 발로 뛰는 속도로 인해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바이킹 가장 뒷자리에서 앞으로 떨어지는 속도를 정말 사랑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바이킹만 타면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기에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다양한 실험 결과, 내가 가장 행복한 속도는 자전거를 탈 때 구현된다. (사족이지만 두 번째도 꼭 밝히고 싶은데, 봄가을의 제주도에서 110cc 정도의 스쿠터를 타고 달릴 때도 행복이 넘쳐흐른다) 몰입했던 달리기 대신 자전거를 선택하게 된 유일한 이유다. 기온 20도 즈음의 맑은 날씨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달리면 세상에 존재하는 더 이상의 행복은 없을 정도다. 머리가 적당히 흩날릴 정도의 기분 좋은 맞바람과 시선을 적당히 돌릴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는 속도는 흔치 않다. 독립을 선언하며 동네를 알아봤을 때 고려했던 요소가 몇 가지 있었다. 교통이 편해야 하고 근처에 종종 갈 만한 공원과 카페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출퇴근이 용이한 거리여야 했는데 그 수단은 당연하게도 자전거였다.



처음에는 따릉이로 시작했다. 세상에, 뉴욕의 시티 바이크도 아니고 파리의 벨리브도 아니고 서울에서 탈 수 있는 공유 자전거 서비스라니. 하지만 자전거의 상태를 담보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과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정류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대체재를 선택했다. 언제 어디서든지 편하게 접고 다닐 수 있으며 경쾌한 페달링으로 속도도 만족스럽게 낼 수 있는 궁극의(!) 자전거 브롬톤이었다.








브롬톤은 영국에서 탄생한 폴딩 자전거 브랜드이다.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영국의 장인들이 일일이 수공업으로 만들고 있으며, 가장 작으면서도 아름답게 접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나 역시 브롬톤을 구매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편의성이었다. 지하철과 버스 같은 이동수단뿐만 아니라 식당과 카페 안에 들고 들어가도 일말의 제지가 없다. 심지어 어떤 이는 제주도나 일본 등지에 놀러 갈 때 비행기에 수하물로 부쳐 가기도 한단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로망 중 하나다. 어쨌든 목적은 장거리 이동용보다는 출퇴근과 도심에서 스팟성으로 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브롬톤 이상으로 적합한 브랜드는 없었다. 구매한 모델은 S2L로 약 10kg의 무게에 2단 기어로 다닐 수 있는 기본형이다. 더 높은 기어와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핸들 형태가 있지만, 어차피 목적은 편의성이니 작고 가벼운 모델로 선택했다. 애정을 담아 몽구라고 이름도 지었다. (이상하게도 탈 것을 사면 몽구라고 이름이 짓고 싶어 진다. 그래서 차와 자전거 이름 모두 몽구다. 괜스레 모 자동차 회장님과 연결 짓지 맙시다.)





몽구를 타는 시간대는 기본적으로 오후와 새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출근과 퇴근을 마친 시간이기 때문에 인적이 드문 길을 마음껏 다닐 수 있다. 출근하는 오후에는 골목이 아름다운 연희동과 연남동의 구석구석을 보는 재미가 있고, 퇴근하는 새벽에는 홍제천 자전거 도로를 따라 그 누구보다도 경쾌하게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가끔 노래도 부르며) 페달링 한다. 그래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날이면 꽤나 행복하다. 특히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할 수 있는 날씨군’이라고 판단하는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사고방식이 단순한 편이어서 그런 것인지 행복을 느끼는 방법도 어렵지 않다. 아니면 그 속도를 찾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언젠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 사건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전거를 타는 행위가 너무 좋다. 그 속도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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