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봄을 맞이하는 자세

작성자
J
작성일
2018-04-13 15:41
조회
728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 (처음에는 '왔다’고 완료형 동사를 썼다가 얼마 전 눈이 내리는 바람에 수정했다. 사월의 눈이라니.) 사계절 중 봄을 편애한다. 사실 좋아하는 이유는 별거 없는데 일단 봄에 생일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계절을 좋아한다고 한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추위를 잘 견디고, 여름에 태어난 사람은 더위를 즐기는 편이라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추위와 더위에 모두 약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봄 태생이다.


학생일 때는 봄에 태어난 것이 싫었다. 시험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생일 파티는커녕 도서관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주만 빠르거나 늦었으면 좋았을 텐데, 타이밍이 이렇게도 절묘했던지. 그래서 그때 당시 부모님께 투정 부리던 레퍼토리의 마지막은 항상 '하필 나는 왜 그때 태어났어?'였다. (혹은 ‘나는 왜 외동으로 태어났어?’)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어느 시점을 맞이할 때마다 어떤 행위를 의식적으로 치르는 걸 좋아한다. 영어로 리추얼(Ritual)이라고 하는데, 종교적인 의식 절차에서 비롯되었기에 그저 규칙적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일종의 경건한 마음을 지니며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대표적인 리추얼이 연말마다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며 한 해동안 수고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온전히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봄맞이 리추얼도 몇 가지 있다. 그중 핵심은 광화문 목련을 보러 가는 것. 이렇게 말하면 뭔가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전통이 꽤 됐다. 13년 봄날,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가 가진 몇몇 장점 중 하나가 감동적인 위치였다. 앞에는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이 뒤에는 덕수궁과 정동길이 있어서 출퇴근길이 늘 즐거웠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옆 건물에 시네큐브가 있었다.) 점심 식사 후 동기들과 산책을 하곤 했는데, 이 시간이 참 좋았다. 사내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산 다음, 회사에서 경향신문으로 그리고 정동 제일교회에서 덕수궁 뒷 돌담길로 한 바퀴 걷는 코스였다. 코스 예찬을 조금 하자면, 보도는 넓고 차도는 한적해서 사람이 많아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 또한 가로수들이 계절마다 매력을 뽐내기 때문에 사시사철 아름답다. 걷다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하는 산책길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자연스레 먼저 떠오르는 길이 됐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근방에서 일하는 모든 회사원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매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산책을 다시 시작하는데, 한 바퀴 돌아 금호 아시아나 빌딩 뒤편을 향하다 보면 사거리에 목련 한 그루가 보인다. 아직은 솜털 만을 드러낸 채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며칠 지나면 부풀어 오르던 꽃봉오리가 터져 나와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자태로 행인들을 맞이한다. 그 순간 봄이 왔다는 것을 느낀다. 온 마음을 담아 색을 감상하고 향을 맡으며 순간의 감정을 새기기 위해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매년 봄마다 이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이 습관이 됐고, 심지어 퇴사하여 지금의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변함없다. 오랫동안 함께 하자는 마음으로 이름까지 지어줬다. (창의성 제로의 네이밍이지만) 광화문에 있으니 광화문 목련이 됐다.


이상하게도 매해 겨울은 힘들었다. 추위에 약해서 몸은 늘 움츠러들었고, 함께 했던 인연과도 연말이 되면 헤어지는 게 일상화됐다. 스스로 크리스마스 징크스라 부를 정도로. 그래서 광화문 목련이 더 반가웠는지 모른다. 춥고 힘들었던 겨울을 벗어나, 주체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이 행위가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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