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김밥 1

작성자
J
작성일
2017-05-23 22:41
조회
1317
김밥은 나의 낭만이었다.

어렸을 적에 다큐멘터리를 보면 외국에 있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꼭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걸어다니곤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렇게도 멋져보였다. 뭔가 일과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식사를 한다니. 너무 열심히 그리고 멋지게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자연스레,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치기어린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다닐 땐 김밥을 애용했다. 밀가루보다는 쌀을 선호하는 아저씨 입맛이라, 아무래도 샌드위치보다는 김밥이 제격이었다. 마침 학교 가는 길에 김밥천국이 있었고, 꼭 이렇게 주문했다.

“기본 김밥으로 자르지 말고 주세요. 젓가락, 봉투 모두 안 주셔도 되요”

그러자, 주문을 들은 아주머니의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이렇게 주문하는 사람은 그동안 (아마도) 없었을 테니. 그런데 갈 때마다 요청을 하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셨다. 마치,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주문하면 바로 척척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나는 걸어 다니면서 김밥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김밥의 몸통을 손으로 잡은 후 쿠킹 호일의 윗 부분을 살포시 그리고 조금씩 뜯어가면서.

뜯어먹기 좋은 김밥은 아무래도 기본인 원조 김밥이다. 기본 김밥에는 오직 김과 밥 그리고 단무지, 시금치, 당근, 우엉 정도가 들어간다. (가끔 오이가 들어가는 김밥도 있는데, 단무지의 바삭한 식감과 겹칠 뿐더러 전체의 맛을 잡아먹는 경우가 있어 선호하지 않는다.) 꼬마 김밥을 제외하곤 가장 심플한 구성이라, 뜯어먹기에 최적이다. 가게에서 먹게 되면 보통 참치, 돈까스, 기본 중 하나를 선택하는 편인데, 기본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두껍기 때문에 입으로 잘못 뜯어먹으면 처참히 흩어져 버린다. 하루는 참치 김밥을 입으로 뜯어 먹다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바닥에 깻잎과 참치가 우수수 떨어지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주위에 사람들도 많아서 당황한 마음에 어찌나 얼굴이 빨개졌던지. 그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굴뚝처럼 솟았고, 그 이후로는 오직 기본 김밥만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뜯어먹는 김밥의 묘미를 인정하지 못하고 놀림으로 응수했다. 식사는 자리에 앉아서 해야만 한다는 훈수를 듣기도 했고, 허세가 아니냐며 놀림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게 얼마나 맛있고 멋진 경험인지 모른다. 김밥을 입 크기만큼 자유롭게 넣어서 우적우적 씹으면 맛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데, 썰은 김밥만 입에 넣어 본 사람들은 김밥이 입 안에 있음에도 가득 채워지지 못한 그 허무함 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밥을 먹으며 걷게 되면,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걸음이 느려진다. 고개를 숙이고 그저 김밥만 뜯어먹으며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을 둘러보며 걷게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원래는 걸음 자체가 상당히 빠를 뿐더러, 특히 학교에 있을 때는 오직 앞만 보면서 걷는 편인데 말이다. 김밥 덕분에 학교 안에 있는 은행나무가 얼마나 높고 우거졌는지 알게 되었고, 양 옆을 빽빽이 채우던 대자보들도 어느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자보에는 생각보다 낭만스러운 면들이 많다. 친구의 취업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친구들의 짧은 글부터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익명의 고백까지. 그래서 김밥을 먹으면 정말 나름의 운치와 낭만이 생겨난다.

물론 나만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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