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작성자
J
작성일
2017-05-17 15:23
조회
3883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첫사랑이, 다른 누군가에겐 소풍이, 그리고 내 주위의 누군가들은 징검다리 연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렐 것이다. 지금의 나에겐 평양 냉면과 바다 그리고 봄 정도가 떠오른다. 이런 단어들은 생각할 때마다 작은 두근거림과 함께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중에서도 나는 봄이라는 단어를 편애한다. 드물게 봄은 어감과 오감 모두 사랑스러운 단어다.

봄을 입으로 읊으면 왠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진다. 영어로 봄을 뜻하는 스프링(Spring)이 통통 튀는 생명력을 가진 느낌이라면, 한글의 봄은 포용력을 가진 따뜻함이다. 실제로 봄의 어원을 살펴보면, 불의 옛말인 블과 옴이 합해진 단어다. 즉, 따뜻함이 온다는 의미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점에는 많은 것들이 변한다. 해가 길어지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길을 걷다가 어느새 멈춰서서 꽃 냄새를 맡고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놀랄 때가 있다. 봄을 알리는 몇 가지의 꽃들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나는 목련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다른 꽃에서는 보기 힘든 고결함이 느껴져서 발견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오죽하면, 봄이 올 때마다 찾아가서 보곤하는 목련이 있을 정도다. (심지어 있는 곳의 이름을 따서 광화문 목련이라고 이름도 지어줬다.) 또한 겨우내내 몸을 움츠러들게만 만들었던 바람이 어느새 기분 좋은 산뜻함으로 바뀐다. 그래서 계속 걷게 된다. 때로는 버스 정류장을 하나 두개 쯤 미리 내려서 걷기도 하고.

사실 봄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 있다. 먼저, 내 몸은 추위에 너무나도 민감하다. 그래서 간절기에는 겹겹이 옷을 입어야하고, 머플러로 목을 보호해야만 한다. 겨울만 되면 집에서 작은 긴장감이 맴도는데, 추위를 많이 타는 나와 아버지 그리고 추위를 덜 타는 어머니의 갈등이다. (사실 부부싸움의 가장 큰 이유는 바람도 도박도 아닌, 누가 조금 더 추위를 잘 타고 배고픔을 잘 느끼는가 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불과 난방의 1, 2도 차이로 겨울보다 차가운 냉기가 집안에 흐르기도 한다. 그런데, 봄은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큰 행복 아닌가…!

다음으로, 나는 봄에 태어났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봄에 태어난 것이 그렇게도 싫었다. 초등학생 때는 신학기를 맞이했을 뿐더러, 친구들이랑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전에 생일이 와서 축하를 별로 받지 못했다. 여름이나 가을에 생일인 친구에게 축하를 하노라면, 뭔가 손해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는 꼭 시험기간과 생일이 겹쳤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날 이라기 보다는, 그저 365일 중 하루일 뿐이었다. 그런데 졸업을 하게 되니, 어찌나 좋던지! 생일이 벚꽃의 개화 시점과 비슷해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생일 당일에 보노라면 꼭 세상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 같다는 심각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학생 때는 그렇게도 원망하던 벚꽃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후에 아이가 생기게 된다면 이름에 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름에 봄 혹은 춘이 들어가야 할텐데, 정봄 또는 정춘이라니. 모두 살짝 아쉬운 이름이다. 특히 정춘은 청춘도 아니고 조춘도 아니고, 분명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리라. 이름은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생각해보니 봄을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봄이 소중한 것은 일부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봄은 이름값 하듯 포용력을 가지고 모두에게 찾아간다. 봄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주칠 수 있는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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