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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고뇌를 담은 영화 '더 퀸'과 애주가로서의 엘리자베스 2세 22.09

작성자
J
작성일
2022-10-01 16:25
조회
131
내가 응원하는 프리미어리그 축구팀인 아스널은 소셜 미디어를 부지런하게 운영한다. 경기가 끝나면 최종 점수와 득점자 명단은 물론이고, 통계적으로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도 공유할 정도다. 최근에는 15세의 나이에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던 어떤 선수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 아스널 소셜 미디어가 얼마 전에 있었던 유로파 리그 승리 직후에는 어떤 포스팅도 하지 않았다. 정체성을 드러내는 대문 사진에는 기존의 새빨간 로고가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 소식이 막 퍼지던 날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부터 70년 동안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의 군주 자리에 있었다. 그동안 영국 총리는 열다섯 명이 바뀌었고, 종신 임기가 보장된 교황 역시 여섯 차례 변경됐다. 자국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독재자들조차 여왕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는 집권 기간이었다. 그야말로 한 시대가 저문 셈이다.


2007년 국내 개봉한 영화 '더 퀸'. 사진 네이버 영화

2007년 국내 개봉한 영화 '더 퀸'. 사진 네이버 영화



평민 중의 평민이어서 한 톨의 연관성도 없는 나조차도 그날만큼은 먹먹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계속될 것만 같았던 무언가가 변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언제나 생경한 일이다. 여운이 짙은 마음에 손길이 향하던 것은 여왕의 일생을 직접 다룬 거의 유일한 영화 ‘더 퀸’(2007)이었다. (물론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이 더 심도 있지만,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더 퀸’은 엘리자베스 2세의 고뇌를 비추는 영화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문구처럼, 군주에게는 드높은 명예와 권력만큼 모든 행동에 큰 책임이 따른다. 긴 집권 동안 아마도 여왕이 가장 신경 썼을 일은 자신의 왕관을 이어받을 후보인 맏아들 찰스 3세(찰스 왕세자)였을 것이다. 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찰스 3세 역시 엄마의 속을 썩이는 인물이었다.

왕세자였던 찰스 3세는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다이애나 스펜서(다이애나 왕세자 비)와 결혼했지만,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 끝에 이혼하게 된다. 원인은 찰스 3세의 불륜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이애나 스펜서는 이혼 다음 해에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영국 국민은 충격에 휩싸이고, 온 국가는 애도의 물결로 슬픔에 잠긴다. 영화는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 '더 퀸'의 한 장면.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가 만나는 장면이다.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더 퀸'의 한 장면.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가 만나는 장면이다. 사진 네이버 영화



처음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왕실의 반응은 충격이었지만 슬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슬퍼하는 것은 찰스였을 뿐, 이들은 다이애나의 아들인 윌리엄과 해리 왕세자 형제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을 뿐이었다. 바로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가겠다는 찰스에게, 왕족의 죽음도 아닌데 웬 수선이냐는 반응도 보인다. 마침 이들은 스코틀랜드 발모럴 성에서 휴가 중이었다. 조기를 걸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런던으로 돌아오지도 않자 영국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생전에 다이애나 스펜서와 엘리자베스 2세의 관계는 일반적인 고부 갈등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다소 보수적이었던 여왕과 달리, 다이애나는 대중적인 모습을 자주 노출하며 국민과 정서적으로 가까웠고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있었다. 이런 그의 죽음을 왕실이 등한시하려 하자, 왕실 존폐에 대한 여론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때 엘리자베스 2세는 결심해야만 했다. 왕실의 전통적인 규율을 고수할 것인가, 한발 물러서며 소통할 것인가.

영화 ‘더 퀸’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과거의 실제 영상을 곳곳에 삽입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여왕의 고뇌에 더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럴 때 술 한 잔 마시는 장면이 등장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아쉬웠다. 공식 석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애주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2006년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 여왕의 손에 들린 술이 진 앤 듀보넷으로 추정된다. 사진 Telegraph

2006년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 여왕의 손에 들린 술이 진 앤 듀보넷으로 추정된다. 사진 Telegraph



엘리자베스 2세의 개인 요리사로 10년 이상 일했던 ‘대런 맥그레이디’, 동생인 ‘마가렛 로즈’ 등의 인용에 따르면, 여왕은 다양한 술을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술 취향이 자신의 가족과 유사한 점이 흥미로웠다. ‘드라이 마티니’를 마시는 성향은 아들 찰스와 같았고,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로 알려진 ‘진 앤 듀보넷(Gin and Dubonnet)’은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듀보넷은 프랑스의 아페리티프(식전주, Apéritif)로, 주정강화와인에 블랙커런트와 퀴닌 등을 포함한 각종 허브와 향신료를 인퓨징 및 블렌딩해 만든 술이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식전주 역할을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진과 듀보넷을 1:2 비율로 섞고 슬라이스한 레몬을 넣어 마시는 걸 즐겼다고 한다.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추모하는 마음으로 한잔 만들어서 마셔보고 싶었지만, 듀보넷이 한국에 정식 수입되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한편, 2020년 7월 버킹엄 궁은 여왕의 정원에서 수확한 재료들로 자체 브랜드 진을 출시하기도 했다. 온라인으로 판매됐던 이 진은 8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버킹엄 궁에서 출시한 자체 브랜드 진. 사진 Reuters

버킹엄 궁에서 출시한 자체 브랜드 진. 사진 Reuters



여왕이 점심 식전주로 진 앤 듀보넷을 마셨다면, 저녁에는 달콤한 독일 와인 또는 샴페인을 마셨다고 한다. 독일 와인은 게뷔르츠트라미너(Gewürztraminer)로 추정된다. 샴페인으로는 로열 워런트(왕실 납품 인증) 브랜드인 멈(MUMM), 크룩(KRUG), 랑송(LANSON), 로랑 페리에(LAURENT-PERRIER), 루이 로드레(LOUIS ROEDERER), 모엣 샹동(MOET & CHANDON),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폴 로저(POL ROGER) 그리고 볼랭저(BOLLINGER)를 마셨을 것이다. 이 중에서 볼랭저는 아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식, 손자인 윌리엄과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만찬주로 대대로 사용될 만큼 영국 왕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로이터=연합뉴스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로이터=연합뉴스



‘더 퀸’에서 엘리자베스 2세는 고심 끝에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전통을 고수했을까, 현대를 따랐을까. 앞으로는 여왕의 삶을 조명하는 여러 콘텐트가 나올 것이다. 여왕의 다채로운 면모 중에서 술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영화도 등장하길.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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