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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첫 문장부터 끝마침 까지 온통 이곳에서 였습니다 2019.12

작성자
J
작성일
2020-01-31 12:37
조회
1047
사람마다 특정한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바를 운영하면서 새삼 느낀다. 오로지 보드카 토닉만 주문하는 사람, 언제나 위스키와 칵테일을 동시에 주문하고 한 입 씩 번갈아 마시는 사람, 항상 같은 자리에만 앉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가장 흔한 형태는 일정한 날에 맞춰 오는 사람들인데, 심지어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기념일마다 오는 커플도 있었다. 즉, 책바를 오픈한 지 4년이 넘었으니 이제 네 번 정도 방문한 셈이다.



어떤 이는 토요일 늦은 밤마다 찾아와 마감 시각까지 머무르다 떠나곤 했다. 그는 늘 보드카 토닉을 마시며 손바닥만한 노트에 손으로 글을 썼다.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하는지 빌보드 차트(책바에서 매달 진행하는 백일장)에 종종 응모했고, 많은 호응을 얻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원 프리 드링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와 나 사이에 별 대화는 없었다. 다른 바와 달리 책바는 타인과의 대화보다는 사색에 집중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마감 시각에 신청하던 노래를 통해 가수 권나무를 좋아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밤, 그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표지를 살펴보니, 수필 공모전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와, 이게 뭔가요…?!” 그는 그동안 책바에서 썼던 글을 공모전에 응모해 금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대상을 수상했더라면 정식으로 등단 기회까지 주어지는 권위있는 공모전이었다. 표지를 넘겨보니 안에 손글씨로 쓴 짧은 글이 남겨져 있었다. 그 중 한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첫 문장부터 끝마침 까지 온통 이곳에서 였습니다’



책바는 이름 그대로 바와 서점이 결합된 공간이다. 소설에 등장한 술을 그대로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으며, 단순히 취하는 목적으로써의 음주가 아닌 약간의 알코올을 통해 자신의 숨겨진 감수성과 창의성을 끄집어내는 공간이다. 책바를 운영하면서 이루고 싶은 몇 가지 목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손님들이 책바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의미 있는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현장을 마주하니 소위 불토로 불리는 밤에 홀로 묵묵히 일해왔던 보람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더 많은 희열과 고뇌가 담긴 창작물들이 연희동의 밤을 밝히는 이 곳에서 탄생하길 소망한다.  

 
전체 2

  • 2020-04-16 16:10

    창의성의 결과인 책바가
    또 다른 창작을 낳았네요. 멋집니다.


    • 2022-06-01 00:03

      호균아, 2년이 지나서야 읽었네 ㅎㅎ 잘 지내지?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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