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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영원한 청춘, 황인용 선생님 2019.06

작성자
J
작성일
2020-01-31 12:30
조회
590
“롤모델이 있으세요?”


 세상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질문 중 하나다.탕수육을 먹을 때 찍먹의 지조를 오랫동안 지켜온 사람에게,반나절을 꼬박 굶주린 상태라면 부먹으로라도 먹을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 것 만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그때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롤모델은 없다고 이야기했다.별 이유는 없었다.단지 누군가에 대한 언급을 한 그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갇힌 기분이 들 것 같았다.롤모델이라고 말하는 이상 왠지 따라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흔히들 언급하는 부모님은 분명 사랑하는 존재지만 롤모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생각을 조금 고쳐 먹게 된 계기가 있었다.카메라타에 방문한 직후였다.


 카메라타는16세기 말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모여 토론하던 방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탄생한 클래식 음악감상 카페다.동양방송에서 아나운서와 라디오DJ를 했던 황인용 선생님께서2004년 파주 헤이리에 오픈하셨다.그 때 당시 선생님의 연세는60대 중반이었다.카메라타에 처음 갔던 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족히 아파트 세 층은 되어 보이는 높은 층고가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넓은 공간의 빈틈을 한치도 용납하지 않고 음악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당시 즐겨 듣던 쇼팽의 녹턴2번을 신청했는데 때마침 비가 우둑우둑 내려서 였는지 듣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그 날 이후로 카메라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가 되었다.나도 선생님처럼 중년을 넘어서는 나이가 되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멋진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써본 사람이라면 응당 이런 마음을 먹어봤을 것이다.좋아하는 공간에 내 책이 있었으면 하는 앙증맞은 마음 말이다. 2014년 말 독립출판으로 냈던 책을 카메라타 서가에 몰래 꽂아 두었다.다음에 왔을 때는 책머리에CAMERATA라는 도장이 새겨진 것을 보고 뿌듯해 했다.책바를 오픈한 이후<소설 마시는 시간>이라는 책을 썼을 때는 조금 더 대담해졌다.책에 짧은 편지를 써서 선생님께 직접 선물로 드렸다.첫눈에 반한 사람에게 준 것도 아닌데 역대급으로 어버버 했다.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긴장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여느 때 같던 평일 저녁 책바에서 일하고 있는데,선생님께서 친구와 함께 홀연히 찾아오셨다.책이 재미있어서 두 번이나 읽으셨고,그 안에 등장하는 술이 궁금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만든 분이 내가 만든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러 오신 것이다.그날은 책바를 오픈한 지4년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장 행복한 하루다.여든을 향하는 연세에 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친구와 함께 칵테일 한 잔 드시러 온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70년대부터 라디오 스타였던 선생님은1980년11월 말<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마무리멘트를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자신이 속했던 동양방송의 마지막 날이었다.다행히도 음악에 대한 사랑이 꺼지지 않아25년 뒤 카메라타가 열렸다.황인용 선생님을 떠올리면 영원한 소년,청춘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그는 내 노년의 롤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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