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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틱]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2018.05

작성자
J
작성일
2020-01-31 12:27
조회
503
“어렸을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막상 그 나이가 되니 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보통 오픈 시각에 맞춰 왔다가 밤 열 시만 되면 집을 향했던 손님A가 웬일로 마감 시각까지 남았다. 대화가 필요한 듯 보였다.책바는 바와 심야서점이 결합된 공간으로,타인과의 대화보다는 독서 혹은 멍 때리기 등 스스로와의 시간을 권장한다.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단골손님이라도 깊은 이야기를 할 시간이 많지 않아 정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녀 역시 손님이 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대략적으로 사는 동네 그리고 술 취향 뿐.그나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마감 삼십 분 전 남은 손님들끼리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을 때다.이 때는 다들 책을 덮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A는 집안 사정으로 일찍 취직한 편이다.휴학 한 번 없이 조기 졸업했고,다행히 적성을 바로 찾아 야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책바에 처음 온 것은 자신이 지쳤다고 생각한 즈음이었다.그녀는 롤모델인 상사가 건강 문제로 조기 은퇴한 것을 목도한 이후로 야근을 피하기 시작했다.그런데 막상 여유 시간이 생겨도 무얼 할지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취미도,취향도 없는 사람이 돼버린 것이었다.그나마 책이라도 읽자 싶어서 평소에 좋아하던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책바에 오기 시작했다.그녀는 학생 시절을 그리워했다.정신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그때는 꿈도 취향도 있었다.그녀의 이야기를 듣자,추천하고 싶은 책과 술이 떠올랐다.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절이 있다.이성에 대한 인기도를 기준으로 봤을 때 내 전성기는 초등학생 때였다.학 천 마리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몇 번 받았다는 무용담은 지금까지도 술자리에서 종종 등장하는 안주거리다. 우디 앨런의 영화<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이 생각하는 호시절은1920년대 파리였다. 당시 파리에는골든 에이지(Golden Age)라 불릴 정도로작가와예술가들이 모여 온갖 문화 예술들이 만개했다.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스콧 피츠제럴드 등 이름만 들어도 입이벌어지는 멤버들이 동시대에 같은 도시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있었다.그는 자신이 청춘 시절을 보낸그 당시의 파리가 어찌나 좋았던지, 당시를회고하는 글을 종종 남겼다. 그의 청춘의 문장들이 모여탄생된 책은 제목부터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바로 에세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원제:A Moveable Feast)>다.


“파리는 내게 언제나 영원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나는 평생 파리를 사랑했습니다. 파리의 겨울이 혹독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가난마저도 추억이 될 만큼 낭만적인 도시 분위기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1]


책에는 그가1921년부터1926년까지 파리에 머물던 시간이 담겼다. 당시나이는20대 초중반이었는데,건장한 체격이었지만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배고픔은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고,결국 그가 만든 세계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식욕이 강하거나 술을 즐기는 사람들로 등장하기에 이른다.하지만 그의 삶에는 낭만이 있었다.우리가 파리에 가면 꼭 인증샷을 남기곤 하는 서점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책을 빌려 읽곤 했고,굳이 단골 카페를 정해서 글을 썼다.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와의 일화다.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와 함께 여행을 떠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고,서로의 글을 보여주고 술을 마시며 우애를 다졌다.특정 신체부위의 크기 문제로 고민하는 피츠제럴드에게 걱정 말라며 위로하는 대목은 피식 웃음 짓게 만든다.남자들의 고민은 시대를 넘어 매한가지다.


헤밍웨이는 술을 좋아했다.책에도 곳곳마다 술이 등장한다.오죽하면 그의 별명을 덧붙여 만든 칵테일인'파파 도블레(Papa Doble)’가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고,쿠바 아바나에서 단골로 갔던 바 두 곳은 관광객들의 성지순례가 이어지는 장소가 됐다.그는 두 바와 자신이 사랑했던 칵테일의 이름이들어간 명언을 남기기도 했는데,그 유명한'나의 모히또는 보데기타에서,나의 다이키리는 플로리디타에서(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다.파파 도블레는 다이키리의 변형 버전이다.다이키리는 일반적인 실버 럼(풍미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다크 럼을 더해주기도 한다)과 라임 그리고 설탕 시럽을 넣은 뒤 셰이킹을 해서 만든 칵테일인데,헤밍웨이는 터프하게도 럼의 비율을 두 배로 높여 마셨다.어찌나 자주 마셨던지,그 광경을 지켜본 바텐더가새로운 이름을 붙여줬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떠올랐던 이유는 너무나도 명료했다.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지금 여기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이다.헤밍웨이는 가난하고 모든 면에서 어설펐지만,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나름의 행복을 추구했다.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글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이었다.과거를그리워하던A에게 슬며시 책을 건네줬다.마음가짐에 따라 축제는 지금 이 곳에서도 열릴 수 있다고.술을잘 마시는 분이니,다이키리보다는 파파 도블레 한 잔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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