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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책] 책빠의 숨겨둔 책 2017.07

작성자
J
작성일
2020-01-31 12:22
조회
447
맑은 햇살이 창문을 뚫고 깊숙이 들어온다. 구석의 책장에 놓여진 스피커에서는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 때 마시는 커피의 향과 맛은 교토의 카페가 부럽지 않다. 창문 너머에는 동네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셀럽 고양이가 어슬렁거린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여유롭게 신간을 정리한다. 요즘 별다른 노력을 안해도 사람들이 책을 여러 권 사고 술도 많이 마셔서 일이 늘 즐겁다. 그 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인사를 깜빡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햇살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왠지 그녀는 영화 <노팅힐>의 줄리아 로버츠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바에 마주 앉아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강명의 소설이 요즘 가장 재밌다고 했고, 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때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가 'I’d rather dance with you'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는 이야기를 멈추고 자연스레 노래에 몸을 맡기며 가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입가에 미소가 멈추지 않는 순간이다. 그런데 문득,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


당연히 꿈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대청소를 하는데, 여기저기 쓸고 닦으며 정리를 하다 보니 그새 지쳐서 잠시 잠들었나 보다.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 하던데, 정말로 반대여서 깜짝 놀랐다. 줄리아 로버츠를 닮은 여성이 들어왔을 때 꿈인 걸 의심 했어야 했는데, 멍청하게도 헤벌레 하고 좋아하기만 했다. 내가 꿨던 꿈은 공간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상상해봤을 법한 장면이다. 여유와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라니. 하지만 현실은 반대에 가깝다. 공간을 운영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365일 24시간을 분투하고 있고, 물론 나 또한 그러하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유와 낭만이란 회사원들에게 가끔씩 찾아오는 휴가와도 비슷하다.


내가 운영하는 공간의 이름은 책바다. 이름 그대로 바와 서점이 결합된 공간이다. 책바를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질적인 두 장소를 결합했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을 덜 써도 하나의 장소가 다른 하나의 장소에 의해 묻혀버린다. 그래서 A가 잘 되기 위해서 B가 컨셉의 느낌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닌, A와 B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고민도 많다. 이렇게 결합된 공간은 (아마도)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깊게 했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책을 더 많이 팔 수 있을까?' 였다. 책은 많이 판매할 수록 뿌듯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각했던 목표치를 이루기 위해 더 많은 판매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한국보다 책도 많이 읽고 출판 문화도 발달한 일본 서점에 대한 이야기인 <앞으로의 책방>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서점들은 각자가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독서 경험을 전달한다. 책바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술을 그대로 만들어 판매하듯이, 소설 속에 등장한 향기를 향수로 재현하여 판매하는 서점이 있다. 또 TORINOS BOOK STORE란 서점은 ‘꿈책’이란 서비스를 만들었는데, 일본전기기술연구소(JEL)와 협업하여 고객의 꿈을 알고리즘화 하여 책을 만든다. 다른 어떤 서점은 문고판 책을 약봉지로 포장하여 기분에 따라 처방하여 판매하기도 하고, 저자와 제목 등을 모두 가린 채 한 문장만을 드러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판매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마지막 서점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하나의 시도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이름하여, ‘책빠의 숨겨둔 책’이다. 책바에는 책과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그래서 때로는 책바 주인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로부터 많이 배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과 재미난 기획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요즘 우리나라의 출판 업계에서는 ‘블라인드 북’이라는 이름 하에 몇몇 기획들이 반향을 일으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출판사 세 곳(마음산책, 북스피어, 은행나무)이 협업한 ‘개봉열독 X시리즈’다. 각 출판사에서 책을 선정하고 일부의 정보만을 오픈한 채 판매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조금 비틀어 기획을 해보았다. 판매의 주체인 책바가 책을 선정하는 것이 아닌, 검증된 책바의 단골 손님들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다. 먼저 책이 드러나지 않도록 꼼꼼히 포장을 하고, 엄선한 단골 손님으로부터 받은 간단한 자기 소개와 책 소개를 포장지 겉면에 붙인다. 그러면 그것을 본 다른 손님은 책바의 단골 손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고 이들이 추천한 책의 소개를 보며, 구미가 당길 경우 구매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책빠의 숨겨둔 책’은 흥미로운 판매 방법이자 동시에 손님과 손님 간의 소통을 가능케하는 매개체인 셈이다. 실제로 이 기획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손님들은 책바의 책빠가 누구인지 궁금해했고, 이들이 추천한 책을 사서 읽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술도 열심히 판매해야 한다. 이렇게 책바의 생존을 위한 분투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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