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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운드] 소설 속 주인공에게 주고 싶은 한 잔 2017.07

작성자
J
작성일
2020-01-31 12:21
조회
559
<소설 속 주인공에게 위로가 되어줄 술 한 잔> / Essay (Fiction)


책바에서 새벽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깜빡 졸게 되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눈 앞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들이 앞에 앉아있는 것 아닌가. 바로 소설 속 주인공들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 펜더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났듯이.


#1. 그녀의 삶을 응원할 술 한 잔 (82년생 김지영 / 김지영) 


김지영 씨는 요즘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작년부터 여기저기서 이름을 들을 수 있었고, 최근 어느 국회의원은 대통령에게 그녀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그녀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길거리에서 수없이 마주칠 수 있는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지영이기도 했고, 때로는 영자 혹은 미경이기도 했다. 즉, 그녀는 한 사람이자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바에 조용히 앉아있기만 하더니, 술이 들어가자 자신의 이야기를 연대기 순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여성으로서 그녀가 겪었던 불합리한 차별과 억압이었다. 사실 그녀는 늦은 시각에 혼자 바에 있는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다른 곳에서는 많은 남성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했고, 새벽에 홀로 택시를 타는 것도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 마감 즈음에 남편이 데리러 온다고 한다.


김지영 씨에게는 올드 패션드를 권했다. 호밀로 만든 위스키와 설탕 시럽, 비터 그리고 오렌지의 향이 더해진 거칠면서도 은은하게 달콤한 풍미를 가진 칵테일이다. 여성간의 사랑을 다룬 책 <캐롤>에서는 주인공 캐롤이 올드 패션드를 마시곤 했다. 지금보다도 차별이 심했던 20세기 중반, 그녀들은 사회의 억압에 맞서며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했다. 김지영 씨에게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는 정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삶을 응원하는 우리가 있다.


#2. 행복한 상상으로 이끄는 술 한 잔 (위대한 개츠비 / 제이 개츠비) 


이 남자는 책바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멋지게 차려 입고 왔다. 포마드로 정성스럽게 매만진 깔끔한 머리에 핏이 맞는 수트를 입었고, 왠지 디카프리오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미소를 건넸다. 순간 반할 뻔 했다. 그런데 얼굴을 자세히 보니, 우울과 갈망이 공존하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에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하필이면 유부녀란다. 다소 경박하지만, 몹시도 아름다운.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개츠비는 조직 폭력배와 함께 밀주를 만들고 불법도박을 하여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그가 돈을 모았던 이유는 오로지 사랑하는 그녀, 데이지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해야 했다. 그는 밤마다 저 멀리 데이지 집에서 비춰지는 녹색 빛을 응시한다고 했다. 또한 칵테일도 그녀가 좋아하는 진 리키와 민트 쥴렙만 마신단다. 마침 두 칵테일을 대표하는 색이 모두 녹색이란 점은 신기한 사실이다.


이번에도 두 술을 주문하려는 그에게 허니문이란 칵테일을 추천했다. 허니문은 애플 브랜디인 칼바도스, 각종 약초가 들어간 리큐어인 베네딕틴과 오렌지 리큐어인 쿠엥트로 그리고 레몬즙이 들어간 칵테일이다.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이 술은 이름만 봐도 어느 상황에서 마시는 술인지 유추할 수 있다. 낭만적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그에게 허니문을 마시며 잠시라도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길 기원했다. 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데이지보다 당신이 아깝다.


#3. 자존감 회복에 도움이 되는 술 한 잔 (노르웨이의 숲 / 고바야시 미도리)


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 책바의 분위기가 한결 산뜻하고 밝아졌다.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만나고 싶었던 미도리가 책바에 온 것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보드카 토닉을 주문했다.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 뒤편에 위치한 재즈바 DUG의 레시피대로 만들어 달란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다섯 잔을 연거푸 마시더니 고민이 많다고 토로했다. 뇌종양으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요즘 가깝게 지내는 와타나베라는 녀석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어제는 오랜만에 전화를 해놓고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단다. 다시 열이 받았는지, 말보로와 성냥을 챙기고는 잠시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술 한 잔을 만들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미도리에게는 자존감을 회복하라는 의미에서 이름에 어울리는 칵테일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바로 미도리 사워다. 멜론 리큐어인 미도리와 레몬즙 그리고 설탕 시럽을 섞고 기호에 따라 소다수를 채우기도 한다. 미도리 사워는 기분 좋은 새콤달콤함이 어우러졌는데, 알코올 도수가 낮기 때문에 이것도 다섯 잔이나 마실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따 잠시 나가서 딸기 쇼트케이크를 한 피스 사와야겠다. 지금 그녀에게는 투정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틈이 필요하다.


#4. 부끄럼을 잠시 잊혀줄 술 한 잔 (인간실격 / 오바 요조)


40대로 보이는 어떤 남성이 들어왔다. 지금껏 만났던 손님 중에서 가장 어둡고 우울한 표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서로의 나이를 터놓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다. 얼마나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나직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고 한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점차 비뚤어졌다. 그러다가 몇몇 사건으로 인해 집안에서 버림을 받았고, 자살 시도를 수차례 했다. 심지어 스스로를 인간 실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유일하게 행복한 순간은 만화를 그릴 때라고 말하는 그에게, 책바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1인석 좌석을 안내했다.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의식할 필요없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리라.


고흐를 좋아해서 압생트를 마시려고 하길래, 압생트가 들어간 칵테일을 대신 마시라고 권했다. 이 술에는 압생트와 라임즙을 넣고 진저 에일을 가득 채운다. 압생트의 진한 풍미에 산뜻함이 더해진 보헤미안 뮬이란 칵테일이다. 술을 마시고 작은 행복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사랑을 추가로 담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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