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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생애 마지막 순간에 마시고 싶은 책 한 잔 2017.02

작성자
J
작성일
2020-01-31 12:07
조회
374

무엇이든 시작은 참 중요하다. 사랑에 빠지게 될 사람과의 첫 만남, 커리어의 방향을 결정하는 첫 직업, 하물며 한 해의 첫 식사 메뉴까지 시작의 순간은 늘 기억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첫 식사로 책바 마감 후 24시간 순대국 집에서 따끈한 순대국을 먹었다.)




시작은 도전이자, 방향성이다. 1에서 2보다 0에서 1로 만드는 것이 어렵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이 되기도 하고 +1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은 첫 발걸음이 꽤 좋다. 새해를 맞이하는 책으로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었기 때문이다. 저자인 폴은 상당히 흥미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는 '의미 있는 인생'이었는데, 이를 위해 고민하던 삶은 작가 혹은 의사였다. 처음에 그는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문학으로 석사까지 취득했다. 하지만 깊은 고민 뒤 의학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의사의 삶을 선택한다. 의사는 책에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신경외과를 선택했다. 조금 더 몸이 편하고 좋은 조건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의 기준에 불과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직업이 아닌 소명이었다.



그렇게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소명을 다하고 정점에 다다를 무렵, 거짓말처럼 암이 찾아온다. 그의 나이는 불과 30대 중반이었고 암이 찾아오기에는 누가 봐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 삶에 암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생을 바라보게 될 것인가. 보통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에 빠지거나, 더 열심히 삶을 살거나. 단연코 그는 후자였다. 죽음을 목도하고 있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 걷던 길을 계속 걸었다.



그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수술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왜냐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p.179)




고백하건데,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숨을 쉴 수 있다는 인간 본연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두렵고, 사유를 할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아찔하다. 그러니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가 가진 인간 정신의 숭고함에 감탄할 수 밖에. 하지만, 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이내 수술대에서 다시 내려오게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라면 사랑하는 아내인 루시와 딸 케이디가 늘 곁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책의 말미에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루시의 글이 함께 담겨있는데, 숙연함과 동시에 그의 여유도 느껴져 괜스레 더 마음이 찡해진다.




폴은 마지막 토요일을 가족과 함께 아늑한 거실에서 보냈다. 그는 안락의자에 기댄 채 케이디를 데리고 놀았고, 시아버지는 내가 케이디에게 젖을 먹일 때 쓰는 흔들의자에, 시어머니와 나는 근처의 소파에 앉았다. 폴은 무릎 위에 앉힌 케이디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살살 흔들어댔다. 케이디는 아빠의 콧속으로 산소를 넣어주는 관을 의식하지 못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폴의 세계는 더욱 작아졌다. 가족이 아닌 손님은 돌려보내는 내게 폴은 이렇게 말했다. "만나지는 못해도 내가 사랑한다는 건 다들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 친구들의 우정이 소중해. 그리고 아드벡 한 잔 더 마신다고 해도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거야." (p.240)




마지막 주말, 그가 떠올렸던 아드벡(Ardbeg)은 싱글몰트 위스키이다. 어원은 게일어로 Àrd Beag이며, 이는 작은 곶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름 값을 하듯 스코틀랜드 서쪽에 있는 아일라 섬 해안에 증류소가 있다. 이 섬에는 아드벡 말고도 몇몇 증류소가 있는데, 이들이 생산하는 위스키는 공통적으로 스모키한 피트(Peat)와 바다의 짠내가 어우러진 향과 맛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드벡은 피트 향의 정도가 다른 위스키들에 비해 강렬한 편이다. 처음 마시는 사람은 향만 맡고도 아찔할 정도이다. 이런 위스키를 즐겼던 폴의 삶 역시 짧지만 강렬했으리라.




누구에게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온다. 그 마지막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그 때 함께하는 것이 아드벡이기를.


_



레시피 (음용방법)




1) 위가 좁고 아래가 볼록한 위스키 전용 글래스에 아드벡 10년을 1oz(=30ml) 따른다.

2) 처음에는 그대로 마시다가, 위스키의 풍미를 더 느끼고 싶다면 물을 3-4방울 떨어뜨린다.

3) 위스키를 목에 넘기고 코로 숨을 내뱉으면, 잔향을 더욱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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