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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아련함이 떠오르는 책 한 잔 2016.11

작성자
J
작성일
2020-01-31 11:59
조회
363
도박을 다루는 영화에서 들어봤음직한 룰렛(Roulette)이란 단어는 프랑스어로 '작은 바퀴'를 의미한다. 딜러는 돌아가는 작은 룰렛판 안에 구슬을 굴리고, 플레이어는 구슬이 도착할 숫자와 색상을 선택하여 자신의 운을 판단한다. 느와르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러시안 룰렛은 회전식 연발권총에 하나의 총알만 장전하고 머리에 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기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게임이다. 즉, 룰렛이 의미하는 것은 운이다. 은희경 작가의 <중국식 룰렛>은 1976년에 개봉했던 동명의 영화에서 이름을 따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도박도 권총도 신경을 쓸 필요 없다. 영화 내에서 등장한 중국식 룰렛이 의미하는 것은 '진실 게임'이기 때문이다.


<중국식 룰렛>의 등장인물은 운이 부족한 남자들이다. 아버지의 연줄로 인턴으로 일하고 있으나 적응을 하지 못하는 젊은 남성, 어렸을 적부터 사랑했던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으나 막상 발기가 되지 못해 꿈을 이루지 못한 중년 남성, 아내와 이혼 진행 중이며 동시에 환자에게 소송을 당한 나. 그리고 가슴 아픈 사랑을 했으며 죽음을 앞두고 있는 바 오너 K. 그래도 오늘만큼은 이들에게 약간의 운이 허락되었다.


K가 운영하는 바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다. 싱글몰트 위스키 세 잔이 나오는데, 각기 다른 술이 담긴다. 손님은 이 중 하나를 골라서 마신다. 값은 같으나, 싸구려일 수도 최고급일 수도 있다. 술의 정체는 끝내 알 수 없다. 운이 좋게도, 오늘 이들이 선택했던 술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K는 운이 따랐던 이들을 모아,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진실게임은 시작된다.


공교롭게도, 과거에 중년 남성과 함께 바에 왔던 여성 그리고 나의 아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싱글몰트 위스키는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중년 남성이 하는 말을 들으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이 서지않는 혼란에 휩싸인다. 그 여성(혹은 두 여성들)이 좋아하는 위스키는 라가불린 16년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문득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내는 특별한 날에만 라가불린 16년을 마셨다. 언젠가 아내는 행복한 사람에게 특별한 날이란 기쁜 날이 아니라 슬픈 날이라는 말을 했다. 행복하다는 말은 농담이겠지만 어쨌든 라가불린은 아내가 슬플 때 마시는 술이었던 것이다. 그 술이 품고 있는 바다냄새와 연기의 향이 자기가 자란 고향의 저녁 풍경을 떠올리게 해준다고도 말했다.


라가불린은 스코틀랜드의 서쪽에 위치한 아일라 섬에서 만들어진 싱글몰트 위스키다. 발아된 보리를 건조시킬 때 이탄의 향을 씌우기 때문에 스모키한 향이 나며, 다른 위스키와 차별되는 풍부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라가불린을 처음 마시는 사람들은 보통 큰 충격을 받곤 한다. 첫 느낌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나는 라가불린을 처음 마셨을 때, 자연스레 19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의 괴승인 라스푸틴이 떠올랐다. 이름이 비슷할 뿐 더러, 강렬한 느낌마저 비슷하기 때문이다. 라스푸틴은 알렉산드라 황후의 지지를 받으며 역사상 손꼽히는 폭정을 펼친 인물이다.


하지만, 라가불린과 라스푸틴은 첫 느낌만 비슷할 뿐이다. 라가불린의 숨겨진 매력은 가끔식 문득 생각나는 아련함에 있다. 특히 어두운 밤바다에서 파도소리를 들을 때,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 내음을 맡을 때마다 라가불린에 대한 간절함이 피어오른다. <중국식 룰렛> 역시 위스키의 잔향과도 같은 긴 여운을 주는 소설이다. 진실 여부를 판단 내리기 어려운 대화 속에서 내 인생에 담겼던 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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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 (음용방법)




1) 위가 좁고 아래가 볼록한 위스키 전용 글래스에 라가불린 16년을 1oz 따른다.

2) 처음에는 그대로 마시다가, 위스키의 풍미를 더 느끼고 싶다면 물을 3-4방울 떨어뜨린다.

3) 위스키를 목에 넘기고 코로 숨을 내뱉으면, 잔향을 더욱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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