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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반성

작성자
J
작성일
2017-12-30 01:30
조회
2910
여러가지 일들로 정신없이 살았으나 뜨거운 날들 역시 가득했던 2017년.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닌데, 유독 올해는 좋아서도 슬퍼서도 눈물을 흘린 날들이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눈물이 많아진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가보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자면 감정 표현에 솔직했고 주저하지 않았다.


# 2017 반성

1. 일
- 책바: 외형 달성은 이루지 못했지만 내실을 다질 수 있었던 해였다. (목표로 삼았던 책 매출은 약 40% 증가) 기분 좋았던 점은 작년부터 간절히 바랐던 김영하 작가를 책바에서 손님으로 만날 수 있었고, 노년의 롤모델인 카메라타의 황인용 선생님께서 '내 책을 재밌어서 두 번 읽고 책바도 마음에 들어 두 번이나 오셨다'는 것! 그리고 2주년을 맞이했고, 고민 끝에 앞으로 2년을 더 (재밌게) 하기로 결정했다.
- 니플리스: 새로운 채널(네이버 스토어팜)을 개척하고 모델(!)로 유니클로를 패러디한 바이럴 광고도 찍는 등 노력을 했으나, 주된 일이 아닌만큼 더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전문 판매자들과의 경쟁은 역시 쉽지 않다. 그래도 역시 니플리스가 최고예요! 라는 리뷰를 볼 때마다 뿌듯하다.
- 책: <소설 마시는 시간>은 2017 상반기 세종도서에 선정되어 (드디어) 중쇄에 성공했다. 다행히도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은 2주년 기념도서와 함께 입고를 진행함으로써 신규 입고처를 확장 시켰다. 그런데 지나치게 솔직한 글이라 나이를 먹을수록 부끄러움 역시 커지는듯.
- 글: 처음에는 에세이를 쓰려다가, 이런저런 일을 핑계로 지속하지 못했다. 11월에 이르러서야 정신 차리고 처음으로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 타이밍에 맞춰 신춘문예를 제출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메시지는 담았다고 생각하기에 절반의 만족.
- 강연: 상반기까지 ‘퇴사학교'에서 강연을 했다가, 하반기에 이르러 ‘인생학교'로부터 제안 받고 새로운 시작을 했다. 2년 전에는 학생으로 수업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 의미가 있었던 선택. 그 외에도 칵테일과 위스키에 대한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BCG, 삼성전자 등)

2. 기초 체력
- 영어: 영어는 정말 인생의 난제다. 매년 제대로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지속시키지 못한다. 사실 지금 당장의 일에 큰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의 목표에도 영어는 들어가겠지.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지 끊임없는 고민이다.
- 독서: 일주일에 한 권을 읽자는 원대한 포부를 세웠으나, 결국은 그 시간에 일을 했고 글을 썼다. 그래도 수량을 채우기 위한 독서가 아닌, 지금 읽어야 읽을 수 있는 긴 책(예: 안나 카레니나)들을 읽었던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 운동: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365일 중 131일을 헬스장에 나갔다. 역시 이틀에 한 번 하는 것은 힘들다. 소소한 재미는 여름 한 달 동안 했던 수영이었다. 제대로 다시 배우기 시작한 것이 거의 20년 만인데 재밌어서 내년에도 할 계획.
- 재무: 올 한해 모으고자 하는 금액을 턱걸이로 달성했다. 하지만 재테크보다는 본업과 부업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음. 어쨌든 목표는 이뤘으나 내년에는 재테크에 의한 달성 비중을 높이는 것으로.
- 예술: 전시와 공연을 약 16차례 정도 보았다. 그러나 횟수보다 좋았던 것은 가슴이 두근거릴 경험들을 했다는 점.

3. 기타
- 여행: 원래 계획했던 곳이 ‘런던, 포르투갈, 오사카&교토, 제주도 등’ 이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런던을 제외한 모든 곳에 다녀왔다. (런던은 아스날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시 가는 것이라 못 간 것임. 아마 평생 못 갈 것 같다.) 3월에 다녀온 스쿠터 여행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고, 6월에 갔던 교토는 계절마다 가고 싶은 도시로 등극.
- 개인보다 사회(특히 어려운 사람들)를 생각하는 마음: 생각도 실천도 못했다. 반성한다.


# 2017 키워드

일단 떠오르는 대로 막 써보자.

책바, 단색 프라이탁, 리니지2 레볼루션, 에어팟, 맥북, 라이카 C, 드로잉, 수영, 알쓸신잡, 인스타그램, 유니클로, 발렌타인, 이소라, 우리가 술을 마시며 쓴 글, 책바 전용잔 제작, 텀블벅 공모, 박주영&정진서 형, 나이트 호크 by 에드워드 호퍼, 반 고흐, 어라운드, 아스날, 니플리스 바이럴 광고 촬영, 유영국과 김보희의 발견, 생일과 2주년에 취함, 포트와인, 아이코스, 달총, 남의 집 프로젝트, 수면안대 & 치간칫솔, 신춘문예 제출, 책빠가 숨겨둔 책. 뭐야, 이렇게 써보니 올해 정말 별게 없었다.

1. 책바
고독과 환희, 고민과 행복, 고생과 성취의 총체적 경험.

2. 리니지2 레볼루션
아마 중1 부터 고1 때까지 리니지를 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노가다 게임에 불과한데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재밌었다. 그런데 올해 초 리니지가 모바일 게임으로도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오늘에 이르렀다. 철 없던 학생도 아니고 서른이 넘은 어른인데 왜? 일단 게임 자체가 재밌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핸드폰으로 하나의 게임을 일년 가까이 한 적은 처음이다. 그런데 재미를 넘어 마음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부분이 아무래도 컸다. 게임 특성 상 혈맹(길드 혹은 팀 개념)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엄청난 메리트였다. (더불어 나이, 지역, 직업 등이 정말 다양하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심지어 오픈 카톡창도 만들어서 게임 이야기와 일상을 끊임없이 공유한다. 이 채팅방은 단체 카톡방이 활성화 되지 않은 나에게 마치 화수분처럼 허전함을 채워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3. 신춘 문예
32살에 단편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제출한다는 사실은 불과 올해 초만 하더라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단지 단편 소설을 한 편 쓰자는 욕심이 있었고 한 달 동안 매주 6일씩 꼬박 쓰다보니 마침 신춘문예 제출일이었다. 당선 보다는 쓰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둬서인지 그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내년에도 이어나가기로.

4. 나이트 호크 (by 에드워드 호퍼)
외로울 때 또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음 먹을 때 곁에 있어주고, 글을 쓸 때에는 영감이 되었던.

5. 맥북 & 에어팟
원체 물건을 살 때 신중한 편이라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인데, 맥북과 에어팟은 후회를 넘어 만족도가 극대화된 아이템이었다. 맥북을 통해 글을 쓰고 일하는 것이 더 즐거워졌고, 에어팟을 통해 말하고 듣는 행위가 말도 못하게 편해졌다.


많은 것(곳)을 보고 듣고 읽고 가고 느꼈지만 그 중에서 간추리고 간추려서 최대 다섯가지 씩.
2017 영화: 너의 이름은, 노무현입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 러빙 빈센트, 서칭 포 슈가맨
2017 노래: 쇼팽 발라드 1번 (마우리치오 폴리니), WAVE (카를로스 조빔), Track 9 (이소라),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첼로 소나타 가단조 1악장 (요요마), 좋아해 (치즈)
2017 전시: 절대와 자유 (유영국, @덕수궁현대미술관), 자연이 되는 꿈 (김보희, @갤러리학고재), 나를 기억해 쿠바 (김물길 외 2인, @캐논갤러리), 개인전 (줄리언 오피, @SIMA)
2017 공연: 댄스 인투더 뮤직(국립발레단, @예술의전당), 호두까기인형(국립발레단, @예술의전당), 클래식 리사이틀 (권기만, @스튜디오 리움)
2017 장소: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서울), 굴벤키안 뮤지엄(@리스본), Bar Rocking chair(@교토), 가모강 근처 산책로(@교토), aA 디자인 뮤지엄(@서울)
2017 책: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 남아있는 나날(가즈오 이시구로),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안도 다다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어빙 스톤), 발뮤다(매거진 B)
2017 먹거리: 마티니&맨하탄(Rocking chair, @교토), Andresen 10년 화이트 포트와인 (@포르투), 한우 + 루이 마티니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우가), 목살(이층집 교대점, @서울), 얌마9호 준마이긴죠 무로카나마겐슈 (슈토 양재점, @서울)


# 2017 기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

1. 책바 2주년
다른 사람이 걷지 않았던 길을 혼자 개척하며 걷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혼자서 일하는 것도) 사실 2주년을 앞두고 상반기 내내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고. 당장은 너무나도 행복하게 만족하며 일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미래가 어떨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단 2년을 더 하기로 결심하고 나니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너무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이 길을 묵묵히 걷다보면 또 다른 멋진 길로 이어지리라 믿는다. 그리고 2주년은 앞뒤로 참 치열했다. 2주년을 몇 주 앞두고 책바 문학상을 열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정신없이 글을 공모하고 당선작을 선정했다. 또한 탄생한 책을 판매하기 위해 텀블벅 지원을 했고 평소에 만들고 싶었던 책바 전용잔도 만들었다. 추석 연휴 직전에 배송을 완료해야 했는데, 책과 유리잔을 함께 발송하는 것이라 준비가 참 쉽지 않았다. 어쨌든 결과물은 만족스러웠고, 다시 생각해도 정말 수고 많았다.

2. 드디어 그가 왔다.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어서인지 신기하게도 얼굴을 잘 기억하고 알아본다. 그래서 연예인 뿐만 아니라 책바에 오셨던 분들도 재차 방문하면 알아채고 인사를 건네는 편이다. 이제 쓰게될 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년에 썼던 아래 글을 먼저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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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와의 인연

책바를 처음 오픈했을 때 농담 삼아 지인들에게 하던 소리가 있었다. "책바의 목표가 뭐야? 아님 성공 기준은?" "두 명만 오면 돼. 한 명은 전두환(정말 농담)이고, 한 명은 김영하 작가야."

책바가 있는 연희동에는 김영하 작가가 거주하고 있고, 종종 작품을 재미있게 읽어왔던(그리고 영향을 받았던) 그가 책바에 온다면 그야말로 나는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만큼 설렜던 두 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남겨본다.

Ep.1
어느 날 평상시처럼 저녁을 먹으러 연희동을 어슬렁 거리다가, 저 먼치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거리는 멀어도 유난히 큰 키와 검은 뿔테 안경이 눈에 들어오더라. 그렇다. 그는 부인과 함께 저녁 마실을 나온 것이었다. 100m, 50m, 20m, 5m... 이렇게 가까워지는 동안 가슴은 쿵쾅거렸고,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 그 때 당시 나는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고, 1) 모른척 지나간다 2) 그냥 쳐다보기만 한다 3) 이어폰을 빼고 가볍게 목례를 한다 4) 이어폰을 빼고 책바 소개를 한다 5) 이어폰을 빼고 팬이에요!를 외치고 도망치듯 지나간다 등등이 다 떠올랐다. 그리고 더 생각들이 떠오를려는 찰나, 그가 막 지나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이후로 사러가 쇼핑센터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그 때도 여전히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저만치서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SNS에 못난 스스로를 탓하며 징징대는 글을 썼다.

Ep.2
책바에서 평소처럼 일하고 있었는데, 종종 오던 손님이 선물이 있다며 책을 건네 주셨다. 뭐지? 하고 봤는데, 김영하 작가의 <검은 집>이었다. 그리고 펼쳐보니, 내 이름과 함께 김영하 작가의 싸인이 담겨 있었다. 사연인즉슨, 손님께서 징징대는 내 SNS를 보시고 김영하 작가의 강연에 가서 사인을 받아오신 것이었다. 뭉클거리는 감정이 저 가슴 깊숙히부터 밀려 올라왔다. 정말 너무 감사해서 어찌할 줄 몰랐던 순간.

내년엔 오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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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의 스타칼리 휘트니스 센터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운동을 한다. 낮에 하다보니 아무래도 한산한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그를 발견했다. (두근1) 결코 작지는 않은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분명 김영하 작가였다. 지난 기억들과 달리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이 확보됐다. 그렇게 심호흡을 가다듬고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저는 책바를 운영하는 정인성 이라고 합니다. 혹시 들어보셨나요? 이하 책바 설명 쏼라쏼라 한 뒤, 오세요! 라고 마무리”

다행히도 그는 책바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짧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헬스장에서 만나게 됐고 때로는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봄날의 기운이 가득한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책바 오픈 준비를 마치고 손님을 맞이하려 하는데, 홀연히 그가 들어왔다. (두근2) 선약이 있는데 시간이 남아서 오신 것이었다. 마침 다른 손님도 없어서 30여 분간 독대를 할 수 있었고, 그 와중에 떨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스스로 대견해했다.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라는 말을 되새김 할 수 있어 참 뿌듯했던 하루.

3. 또 다른 그가 왔다.
우리나라에서 정말 좋아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파주에 있는 ‘카메라타'다. 황인용 전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음악감상 카페로, 공간 자체의 모습 뿐 아니라 분위기를 참 좋아한다. 더불어 은퇴 이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공간을 운영하는 모습이 참 멋져보였다. 그래서 노년의 롤모델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다니며, 종종 방문할 때마다 인사를 드리곤 했다. 그러다가 작년 말 <소설 마시는 시간>을 쓰게 되었고, 카메라타에 비치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작은 편지와 함께 선물로 드렸다. 조금이라도 읽어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알고 있다. 너무 진부한 표현이다!) 황인용 선생님이 책바에 오셨다. 사실 김영하 작가는 책바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에 예상을 했지만, 황선생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의 주인장이 저멀리 책바까지 오셨다니. 황선생님께서는 책이 너무 재밌어서 무려 두 번이나 읽었다고 말씀하셨다. 분명 연세도 많으셔서 책을 읽기 쉽지 않았을텐데 너무 황송했다. 그리고 이후에 한 번 더 오셨다. 이 때는 평생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책바에서 기념 사진도 촬영했다. 계속 발걸음을 따라 갈 수 있도록 오랫동안 건강하게 일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4. 처음으로 작품을 구입하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 중 하나가 미술관을 짓는 것이다. 그 규모가 어떠하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공간. 그렇다면 자연스레 필요한 것이 그 공간을 채우는 작품이다. 때마침 평상시 관심을 두던 김물길 작가의 새로운 전시가 열린다길래 갔다. (김물길 작가는 약 3년 전 옥인동 전시를 통해 알게된 젊은 화가로, 르네 마그리트가 연상되는 창의성과 따뜻함을 고루 가지고 있어 좋아한다) ‘쿠바 여행’이 주제였는데, 역시나 모든 그림들이 만족스러웠고 그 중에서도 어떤 작품은 마음 속 깊이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전시 담당자 분에게 작품의 가격과 판매 유무를 물어봤는데, 아직 팔리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조금 무리해서 살만한 가격인 것이었다...! 그래서 짧지만 깊은 고민을 한 뒤 사기로 결정했다. 누군가는 이 돈으로 여행을 가고, 좋은 물건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지만, 나는 올해 한 소비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일단은 내 침대 곁으로.

5. 굴벤키안 뮤지엄 & 제주도 스쿠터 여행
1) 굴벤키안 뮤지엄
9박 10일의 포르투갈 여행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리스본 북부에 위치한 ‘굴벤키안(Gulbenkian) 뮤지엄’이다. 뮤지엄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미술관, 현대미술관, 오디토리엄, 정원이 한 곳에 모여있는 그야말로 꿈에서 등장할 듯한 이상적인 공간이다. 마침 내가 갈 때는 날씨도 너무 좋아서 포르투갈 사람들이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거나 태닝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곁에 누워 여유를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쉽다. 더불어 전시도 참 좋았다. 고대 이집트 시대의 유물부터 절대 왕정의 가구와 인상파 그림 그리고 포르투갈의 전통 타일인 아줄레쥬까지 훌륭한 취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여기가 가장 좋았던 이유는 내가 언젠가 만들고 싶은 공간의 시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굴벤키안 아저씨는 당대 가장 잘 나가는 석유 재벌 중 한 명이었다. 석유 재벌 정도 되어야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니... 음... 슬퍼짐.
2) 제주도 스쿠터 여행
두 번째를 맞이한 스쿠터 여행. 봄과 가을에 제주도에 간다면, 두말 말고 스쿠터를 타야만 한다. 차와 버스 모두 이용해봤지만 스쿠터만큼 제주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교통 수단은 없었다. (물론 제주도의 예측불가한 날씨 때문에 비는 꼭 한 번 이상 맞게 된다) 유채꽃을 보기 위해 떠난 이번 여행은 너무 좋아서 여행 내내 함박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날 아침은 엄청난 폭우를 뚫고 서귀포에서 공항으로 올라왔는데, 몸살에 걸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다 추억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쓰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마음 속에 담아두자.